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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나가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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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교육자이다. 1913년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교육 대학(현 쓰쿠바 대학)과 주오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일본 학사원상을 수상했으며, 도쿄 교육 대학의 명예 교수이기도 하다. 이에나가는 역사 교과서 검정 제도에 반대하며 세 차례 소송을 제기했고, 교과서 재판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초기에는 온건한 입장을 보였으나, 1950년대 이후 반권력적 성향으로 변화하였으며, 그의 저서들은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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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나가 사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에나가 사부로
출생일1913년 9월 3일
사망일2002년 11월 29일
국적일본
직업역사학자
알려진 업적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검열에 반대하는 운동
주요 저서『신일본사』
인물 정보
출생지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사망지일본
배우자미야코
부모아버지: 이에나가 나오타로 어머니: 이토 치요
학력 및 경력
출신 학교도쿄대학 (구 도쿄제국대학)
연구 분야사상사 (일본 사상)
연구 기관도쿄교육대학, 주오대학
지도 학생마쓰나가 쇼조
학위문학 박사
영향
영향을 준 인물우에키 에모리
미노베 다쓰키치
쓰다 소키치
다나베 하지메

2. 생애

이에나가는 1913년 아이치현나고야시에서 태어났다. 1937년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1949년부터 1977년까지 도쿄 교육 대학(현재의 쓰쿠바 대학) 교수를,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주오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3] 1984년에는 일본 학사원상을 수상하고 도쿄 교육 대학 명예 교수가 되었다.

그의 학력 및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934년도쿄 고등학교 졸업[5]
1937년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 졸업[6],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사료편찬소 촉탁
1941년구제 니가타 고등학교 전임 강사, 수개월 후 동(同) 교수
1943년제국학사원 촉탁, 미노베 타츠키치가 주재하는 "제실 제도사" 편찬 사무에 종사
1944년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수
1946년문부성 교과서 편찬 위원 촉탁, 역사 교과서 "구니노 아유미" 집필
1948년일본 학사원에서 은사상 수상. 연구 과제는 상대 왜화 전사, 상대 왜화 연표였다.[7]
1949년도쿄 교육대학 문학부 사학과 교수 (신제 대학 제도에 따른 대학 조직 변경에 따름)
1950년문학 박사 (도쿄 대학: 학위 논문[9]
1977년도쿄 교육대학 정년 퇴관, 주고쿠 대학법학부 교수로 취임
1984년주고쿠 대학 정년 퇴직



그는 일본 고대 사상사, 특히 불교 사상사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며, 우에키 에시모리, 미노베 다쓰키치, 쓰다 소키치, 다나베 하지메 등 근대 사상가들에 대한 연구와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반성에서 비롯된 사상사적 접근을 시도한 논저를 많이 발표했다. 그는 "한국 전쟁"(미국의 침략에 의한)이라고 기록했다.[15]

1963년부터 1973년까지 도쿄 교육대학의 쓰쿠바 이전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73년 쓰쿠바 대학 설치법이 제정되어 쓰쿠바 이전이 정식 결정되자, 이에나가는 쓰쿠바 대학이 "매우 비민주적이며, 기존의 국립 대학과는 전혀 다른" 대학이라고 비판했다.[11]

1965년부터는 일본 정부의 교과서 검정 제도에 대해 세 차례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들은 교과서 검정을 둘러싼 문제를 세상에 널리 알렸으며, 최고재판소는 검정 제도 자체는 합헌이라고 판단했지만, 개별적인 검정 내용에 대해서는 일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54]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이에나가는 1913년 아이치현나고야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군 소장을 지낸 이에나가 나오타로이며, 어머니는 이토 치요이다. 유년 시절은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오사카규슈에서 보냈으며, 아버지가 예비역에 편입된 후 1921년 도쿄로 이사했다.

1934년 도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5] 1937년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를 졸업했다.[6] 1944년 11월에는 사회학자이자 도호쿠 대학 명예 교수인 신메이 마사미치의 장녀 이에나가 미야코와 결혼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당시에는 센다이로 피난해 있었다.[11]

1948년 6월 11일 일본 학사원에서 '상대 왜화 전사', '상대 왜화 연표' 연구로 은사상을 수상했다.[7] 수여식에서는 궁내청 장관과 문부대신으로부터 축사를 받았다.[8] 1950년 도쿄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9]

2. 2. 교육 및 연구 활동

이에나가는 나고야에서 태어나, 1937년 도쿄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1949년부터 1977년까지 도쿄 교육 대학(현재의 쓰쿠바 대학) 교수를,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주오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3] 1984년에는 일본 학사원상을 수상하고 도쿄 교육 대학 명예 교수가 되었다.

그의 학력 및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934년도쿄 고등학교 졸업[5]
1937년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 졸업[6],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사료편찬소 촉탁
1941년구제 니가타 고등학교 전임 강사, 수개월 후 동(同) 교수
1943년제국학사원 촉탁, 미노베 타츠키치가 주재하는 "제실 제도사" 편찬 사무에 종사
1944년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수
1946년문부성 교과서 편찬 위원 촉탁, 역사 교과서 "구니노 아유미" 집필
1948년일본 학사원에서 은사상 수상. 연구 과제는 상대 왜화 전사, 상대 왜화 연표였다.[7]
1949년도쿄 교육대학 문학부 사학과 교수 (신제 대학 제도에 따른 대학 조직 변경에 따름)
1950년문학 박사 (도쿄 대학: 학위 논문[9]
1977년도쿄 교육대학 정년 퇴관, 주고쿠 대학법학부 교수로 취임
1984년주고쿠 대학 정년 퇴직



이에나가는 당초 일본 고대 사상사, 특히 불교 사상사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점차 연구 영역을 넓혀, 우에키 에시모리, 미노베 다쓰키치, 쓰다 소키치, 다나베 하지메 등 비슷한 경향을 가진 근대 사상가들에 대한 연구와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반성에서 비롯된 사상사적 접근을 시도한 논저를 많이 발표했다. 그는 "한국 전쟁"(미국의 침략에 의한)이라고 기록했다.[15]

2. 3. 쓰쿠바 대학 이전 반대 투쟁

1963년 미와 도모오 학장이 캠퍼스 부지가 좁다는 이유로 도쿄 교육대학의 쓰쿠바 이전 계획을 제안하자, 교육학부, 이학부, 농학부, 체육학부는 찬성했지만, 이에나가를 포함한 문학부는 인문과학 연구와 교육에는 자료가 풍부한 도쿄에 남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했다.[11]

1967년 오랜 논의에도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도쿄 교육대학 평의회는 쓰쿠바에서 토지를 취득하기 시작했다.[11]

1968년 쓰쿠바 이전에 반대하는 문학부 자치회 소속 학생들이 교사와 대학 본부가 있는 본관을 점거하면서 분쟁이 격화되었다. 자치회 학생들은 교수진을 모두 권력 측이라고 간주했고, 이전 반대파인 이에나가에게도 단체 교섭 등에서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11]

1969년 미야지마 류코 학장 대행이 기동대의 입교를 허가하고 학생들을 배제하자, 이에나가는 이를 쿠데타라고 비판했다.[11] 같은 해 9월 문학부가 수업을 재개하려 하자 학장은 학생들의 캠퍼스 입교를 거부했고, 학생들은 학장을 제소하여 집행이 정지되었다.[11]

1970년 대학 평의회는 문학부 교수, 조교수, 전임강사의 인사권에 제한을 가하고, 쓰쿠바 이전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의 채용을 중지했다. 또한 전 문학부장 호시노 신이치, 이리에 유키오, 이에나가 3명의 문학부 교수에게 사직을 요구했지만, 문학부 교수회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나가는 쓰쿠바 이전 문제가 "반동 문교 정책"의 일환이며, 교수진의 자치적인 대학 운영 체제에서 학장 중심의 중앙 집권적인 운영으로 바꾸고 정부와 재계가 대학에 개입하려 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11]

1973년 쓰쿠바 대학 설치법이 제정되어 쓰쿠바 이전이 정식 결정되었다. 이에나가는 쓰쿠바 대학이 "매우 비민주적이며, 기존의 국립 대학과는 전혀 다른" 대학이라고 말했다.[11] 쓰쿠바 이전 및 개편으로 문학부 학생 모집이 중지되었고, 1977년 이에나가가 정년 퇴임할 때 문학부 정원은 거의 0명이 되었다.[11]

2. 4. 교과서 재판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 정부의 교과서 검정 제도에 대해 세 차례 소송을 제기했다.
제1차 소송 (1965년)이에나가 사부로는 1965년, 자신의 역사 교과서 '신일본사' 검정 불합격에 대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교과서 검정 제도가 헌법 제21조(표현의 자유)와 교육기본법 제10조(교육의 부당한 통제 금지)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12]

재판법원연도판결내용
1심도쿄 지방 법원1974년원고 일부 승소검정 제도 자체는 합헌이나, 정부의 재량권 남용이 있었다고 판결하여 이에나가에게 10만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2심도쿄 고등 법원1986년원고 패소법원은 정부의 재량권 남용이 없었다고 판결했다.
3심최고재판소1993년원고 패소최고재판소는 2심 판결을 유지했다.


제2차 소송 (1966년)이에나가는 1966년, '신일본사' 검정 불합격 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법원연도판결내용
1심도쿄 지방 법원1974년원고 승소법원은 검정이 교육기본법 제10조에 위배되며, 헌법 제21조에서 금지하는 검열에 해당한다고 판결하여 국가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명령했다.
2심도쿄 고등 법원1975년원고 승소법원은 검정 결정에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의 항소를 기각했다.
3심최고재판소1982년파기 환송최고재판소는 교육 과정 지침 개정을 이유로 항소를 파기 환송했다.
4심도쿄 고등 법원1989년원고 패소법원은 원고가 소송의 실익을 잃었다는 이유로 1심 판결을 기각했다.


제3차 소송 (1984년)이에나가는 1982년 교과서 검정 결과에 대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법원연도판결내용
1심도쿄 지방 법원1989년원고 일부 승소법원은 검정 제도 자체는 합헌이나, 소모타이(草莽隊) 묘사에 대한 위헌적 검열이 있었다고 판결하여 국가에 10만 배상을 명령했다.
2심도쿄 고등 법원1993년원고 일부 승소법원은 난징 대학살, 소모타이, 군대의 성폭력 묘사에 대한 위헌적 검열이 있었다고 판결하여 국가에 30만 배상을 명령했다.
3심최고재판소1997년원고 일부 승소최고재판소는 731 부대, 난징에서의 성폭력, 소모타이 묘사에 대한 위헌적 검열이 있었다고 판결하여 국가에 40만 배상을 명령했다.



이 소송들은 교과서 검정을 둘러싼 문제를 세상에 널리 알렸으며, 최고재판소는 검정 제도 자체는 합헌이라고 판단했지만, 개별적인 검정 내용에 대해서는 일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54]

3. 주요 저서


  • History of Japan영어. 도쿄: 일본 여행 안내소, 1964.
  • 一歴史学者の歩み일본어, Japan's Past, Japan's Future: One Historian's Odyssey영어로 번역. 메릴랜드주 래넘: 로먼 & 리틀필드 출판사, 2001. 이에나가의 자서전.
  • 太平洋戦争일본어 (태평양 전쟁). 도쿄: 이와나미 쇼텐, 1968. 논란이 많은 역사 교과서에 대한 반론으로 작성되었으며, 193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전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조사하려 시도했다. 다양한 제목으로 번역됨:
  • * The Pacific War, 1931–1945: A Critical Perspective on Japan's Role in World War II영어 (태평양 전쟁, 1931–1945: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관점). 뉴욕: 판테온 북스, 1978.
  • * The Pacific War: World War II and the Japanese, 1931–1945영어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 대전과 일본인, 1931–1945). 뉴욕: 판테온 북스, 1978.
  • * Japan's Last War: World War II and the Japanese, 1931–1945영어 (일본의 마지막 전쟁: 제2차 세계 대전과 일본인, 1931–1945). 캔버라: 호주 국립 대학교 출판부, 1979.
  • 大和絵일본어 (야마토에). 존 M. 쉴즈 번역. Painting in the Yamato style영어 (야마토 양식의 회화)로 번역. 뉴욕: 웨더힐, 1973.
  • Japanese Art: A Cultural Appreciation영어 (일본 미술: 문화적 이해). 리차드 L. 게이지 번역. 뉴욕: 웨더힐, 1979.
  • 이에나가 사부로 저작집(전16권) 이와나미 쇼텐, 1997-1999년[56]


제목
(1)사상사론
(2)불교 사상사론
(3)도덕 사상사론
(4)근대 사상사론
(5)사상가론 1
(6)사상가론 2
(7)사상가론 3
(8)재판 비판, 교과서 검정론
(9)법사론
(10)학문의 자유, 대학 자치론
(11)예술 사상사론
(12)평론 1, 15년 전쟁
(13)평론 2, 재판 문제
(14)평론 3, 역사 교육·교과서 재판
(15)평론 4, 대학 문제·시평
(16)자전



전집으로 만들면 50권에 달해 너무 비싸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이와나미 쇼텐 측에서 판단, 대표작만을 출판했다. 문고·신서로 여러 번 출판된 《태평양 전쟁》, 《전쟁 책임》, 《일본 문화사》는 처음부터 제외되었으며, 이에나가의 양해를 얻어 16권으로 묶었다[57]. 그 결과, 은사상 대상이 된 《상대 왜 그림 전사》, 《상대 왜 그림 연표》, 《우에키 에모리 연구》나 《쓰다 소키치의 사상사적 연구》는 수록되지 않았다. 16권의 저작 목록에는 모두 제목이 게재되어 있다. 16권의 《어느 역사학자의 걸음》은 2003년에 문고판으로 출간되었다.


  • 『일본 사상사에 있어서 부정의 이론의 발달』(홍문당, 1935년)
  • 『일본 사상사에 있어서 종교적 자연관의 전개』(제등 서점, 1942년)
  • 『상대 왜화 전사』(고동 서원, 1946년) 은사상 수상
  • 『상대 불교 사상사』(묘방 서방, 1947년)
  • 『신 일본사』(부산방, 1947년)
  • 『일본 사상사의 제 문제』(제등 서점, 1948년)
  • 『새로운 일본의 역사』(매일신문사, 1950년)
  • 『신 국사 개설』(부지 서점, 1950년)
  • 『중세 불교 사상사 연구』(법장관, 1952년)
  • 『신 일본사』(삼성당, 1952년 - 1994년)
  • 『상궁 성덕법왕제의 연구』(삼성당, 1953년)
  • 『외래 문화 섭취사론: 근대 서양 문화 섭취의 사상적 고찰』(이와사키 서점, 1953년)
  • 『역사의 위기에 직면하여』(도쿄 대학 출판회, 1954년)
  • 『혁명 사상의 선구자: 우에키 에모리의 사람과 사상』(이와나미 서점, 1955년)
  • 『일본의 근대 사학』(일본 평론 신사, 1957년)
  • 『우에키 에모리 연구』(이와나미 서점 1960년 8월)
  • 『근대 일본의 사상가』(유신당, 1962년)
  • 『대학의 자유의 역사』(환서방, 1962년)
  • 『사법권 독립의 역사적 고찰』(일본 평론 신사, 1962년)
  • 미노베 다쓰키치의 사상사적 연구』(이와나미 서점, 1964년)
  • 『권력악과의 싸움 마사키 히로시의 사상 활동』(홍문당, 1964년)
  • 『교과서 검정: 교육을 왜곡하는 교육 행정』(일본 평론사, 1965년)
  • 『신강 일본사』(삼성당, 1967년 7월)
  • 『근대 일본의 쟁점』(매일신문사, 1967년)
  • 『근대 일본 헌법 사상사 연구』(이와나미 서점, 1967년)
  • 『태평양 전쟁』(이와나미 서점, 1968년)
  • 『교육 재판과 저항의 사상』(삼성당, 1969년)
  • 쓰다 소키치의 사상사적 연구』(이와나미 서점, 1972년)
  • 『다나베 모토의 사상사적 연구: 전쟁과 철학자』(호세이 대학 출판국, 1974년)
  • 『검정 불합격 일본사』(삼일 서방, 1974년)
  • 『일본인의 양복관의 변천』(도메스 출판, 1976년)
  • 『도쿄 교육대학 문학부: 영광과 수난의 30년』(현대사 출판회/도쿠마 서점, 1978년 2월)
  • 『역사와 책임』(중앙 대학 출판부, 1979년)
  • 『원악능의 사상사적 고찰』(호세이 대학 출판국, 1980년 4월)
  • 신란을 말하다』(삼성당, 1980년 6월)
  • 『전쟁과 교육을 둘러싸고』(호세이 대학 출판국, 1981년 4월)
  • 『「밀실」검정의 기록』(교과서 검정 소송을 지원하는 전국 연락회, 1983년 1월)
  • 『칼을 찬 몸의 애처로움 - 이에나가 사부로 논문 창작집』 (중앙 대학 출판부, 1985년)
  • 『전쟁 책임』(이와나미 서점, 1985년 7월)
  • 『태평양 전쟁 제2판』(이와나미 서점, 1986년 11월)
  • 『일본 사상사학의 방법』(명저 간행회, 1993년 3월)
  • 『마키코』(민중사, 1996년)
  • 『한 역사학자의 발자취』(이와나미 서점, 2003년5월 16일)

4. 평가 및 논란

이에나가 사부로는 초기에는 일본 고대 사상사, 특히 불교 사상사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나, 점차 반권력적인 자세를 강화하며 사회적 발언을 하였다. 우에키 에시모리, 미노베 다쓰키치, 쓰다 소키치 등 비슷한 성향의 근대 사상가들에 대한 연구와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반성을 담은 사상사적 접근을 시도한 논저를 많이 발표했다.[14][15] 특히 『태평양 전쟁』은 널리 읽혀 큰 영향력을 가졌지만, 한국 전쟁을 미국의 침략으로 기록하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서술도 있었다.

이에나가의 활동은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으로서 해외에서 평가받았으며,[16] 2001년에는 여러 국가의 학자들에 의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나가는 초기에는 반권력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지망하기도 했고, 전후에는 쇼와 천황에게 진강을 하거나 황태자 아키히토(훗날의 아키히토 상황)에게 역사를 강의하는 등 황실과 관계를 맺었다.[19] 또한, 메이지 천황과 교육칙어를 높이 평가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신일본사'(1947)에서도 메이지 천황에 대한 존경의 글을 쓰는 등 온건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19] 이후 1950년대 역코스라 불리는 사회 상황에 대한 반발로 인해 헌법과 대학 자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반권력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20] 특히 1960년 '우에키 에시 연구' 이후에는 인권 이념을 사상의 핵심으로 삼고 국가권력과 대치하는 문제에 매달리게 되었다.[20]

마쓰나가 쇼조는 이에나가를 이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노력한 철학자이자 사색가로 평가하며, 그의 교과서 소송은 자신의 이념에 충실하려 했던 "사상적 작품"이었다고 말했다.[21]

이에나가는 '전쟁 책임'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지적하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일본 침략의 피해자로 위치시키며 일본에 대한 전쟁 책임을 묻는 여지는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22]

히라카와 유히로는 이에나가를 전후 시대의 어용학자로 평가하며, 일본의 나쁜 면을 열거하고 중국 인민 해방군의 좋은 면을 쓴 역사서를 썼다고 비판했다.[23] 이나가키 타케시는 이에나가가 '일본사B'에서 한국 전쟁에 대해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통일을 목표로 남진하여"라고 기술하여 공산주의 측의 침략을 얼버무리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비판했다.[24]

하타 이쿠히코는 이에나가가 악당(일본 정부, 일본군, 미국, 남베트남, 자본주의)의 악행은 발견하는 대로 쓰지만, 선인(중국, 소련, 북베트남, 사회주의)의 악행은 눈을 감는 버릇이 있다고 비판했다.[25] 예를 들어 이에나가 교과서의 '지도 자료'에는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 라오스 해방, 남북 베트남 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술했지만, 중월 전쟁이나 보트피플 문제는 모른 체하고,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미묘한 문제"라고 표현한 것을 지적했다.[26]

호사카 마사야스는 "전쟁은 악이다"라는 전제하에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이에나가의 검증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27] 무로야 가쓰미는 이에나가를 황국사관의 무리였다가 좌익으로 전향한 역사학자라고 평가했다.[28] 다카야마 마사유키는 이에나가를 전전에는 "펜을 가지고 황국의 방패가 되리라"라고 했지만, 황국이 패망하자 GHQ에 영합하여 역사서를 고쳐 쓴 변절자라고 비판하며, 거짓투성이 교과서를 불합격시킨 문부성에 불만을 품고 국가를 고소한 불모의 교과서 재판을 30여 년이나 계속했다고 비판했다.[29]

나가오 류이치는 이에나가가 끊임없는 정열로 구 일본을 맹렬하게 규탄하는 것은 약을 너무 오래 복용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평가했다.[30] 도요타 아리쓰구는 한국에서 이에나가를 가장 인기 있고 양심적인 역사학자로 여기며, 일본의 검열 때문에 박해받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31] 실제로 한국의 중앙일보에서는 이에나가를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국가권력에 대항한 일본의 양심"이라고 소개했다.[32]

하타 이쿠히코는 이에나가가 "신일본사"(1947)에서 천황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다가 "쇼와의 전후사"(1976)에서 맥아더 옆에 선 키 작은 모닝코트 차림의 일본인으로 묘사하는 등 천황관에 극단적인 변화를 보였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사람은 청소년을 교육하는 교과서 집필자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말했다.[38] 또한 『태평양 전쟁』(1968)을 학술 연구서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평가하며, 인용 문헌의 부적절성, 감정 과다의 기술, 비공개 하바롭스크 군사 재판 진술서 주체, 관계없는 논문 인용, 영어판에서 일본에 불리한 내용 삭제 등을 이유로 들었다.[39][40]

4. 1. 긍정적 평가

이에나가 사부로는 초기에는 일본 고대 사상사, 특히 불교 사상사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었지만, 점차 반권력적인 자세를 강화하며 사회적 발언을 하였다. 우에키 에시모리, 미노베 다쓰키치, 쓰다 소키치 등 비슷한 성향의 근대 사상가들에 대한 연구와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반성을 담은 사상사적 접근을 시도한 논저를 많이 발표했다.[14][15] 특히 『태평양 전쟁』은 널리 읽혀 큰 영향력을 가졌지만, 한국 전쟁을 미국의 침략으로 기록하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서술도 있었다.

이에나가의 활동은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으로서 해외에서 평가받았으며,[16] 2001년에는 여러 국가의 학자들에 의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마쓰나가 쇼조는 이에나가를 이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노력한 철학자이자 사색가로 평가했다.[21] 이에나가는 원래 진보적인 성향은 아니었으나, 1950년대 사회 상황에 대한 반발과 일본국 헌법, 대학 자치에 대한 인식 변화를 계기로 인권 이념을 핵심 사상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나가는 '전쟁 책임'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날카롭게 지적했으며, 통저우 사건도 일본군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중국을 침략 피해자로 위치시키는 등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22]

토요타 아리쓰구는 1994년 자서전에서 한국에서 이에나가를 가장 인기 있고 양심적인 역사학자로 여기고 있다고 소개했다.[31] 중앙일보는 이에나가를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국가권력에 대항한 일본의 양심"이라고 평가했다.[32]

리처드 마이니아는 이에나가를 이노우에 키요시, 토야마 시게키, 마루야마 마사오와 함께 평가하며,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했다.[33]

4. 2. 부정적 평가

이에나가 사부로는 초기에는 반권력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지망하기도 했고, 전후에는 쇼와 천황에게 진강을 하거나 황태자 아키히토(훗날의 아키히토 상황)에게 역사를 강의하는 등 황실과 관계를 맺었다.[19] 또한, 메이지 천황과 교육칙어를 높이 평가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신일본사'(1947)에서도 메이지 천황에 대한 존경의 글을 쓰는 등 온건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19]

그러나 1950년대 역코스라 불리는 사회 상황에 대한 반발로 인해 헌법과 대학 자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반권력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20] 특히 1960년 '우에키 에시 연구' 이후에는 인권 이념을 사상의 핵심으로 삼고 국가권력과 대치하는 문제에 매달리게 되었다.[20]

마쓰나가 쇼조는 이에나가를 이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노력한 철학자이자 사색가로 평가하며, 그의 교과서 소송은 자신의 이념에 충실하려 했던 "사상적 작품"이었다고 말했다.[21]

이에나가는 '전쟁 책임'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지적하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일본 침략의 피해자로 위치시키며 일본에 대한 전쟁 책임을 묻는 여지는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22]

히라카와 유히로는 이에나가를 전후 시대의 어용학자로 평가하며, 일본의 나쁜 면을 열거하고 중국 인민 해방군의 좋은 면을 쓴 역사서를 썼다고 비판했다.[23]

이나가키 타케시는 이에나가가 '일본사B'에서 한국 전쟁에 대해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통일을 목표로 남진하여"라고 기술하여 공산주의 측의 침략을 얼버무리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비판했다.[24]

하타 이쿠히코는 이에나가가 악당(일본 정부, 일본군, 미국, 남베트남, 자본주의)의 악행은 발견하는 대로 쓰지만, 선인(중국, 소련, 북베트남, 사회주의)의 악행은 눈을 감는 버릇이 있다고 비판했다.[25] 예를 들어 이에나가 교과서의 '지도 자료'에는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 라오스 해방, 남북 베트남 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술했지만, 중월 전쟁이나 보트피플 문제는 모른 체하고,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미묘한 문제"라고 표현한 것을 지적했다.[26]

호사카 마사야스는 "전쟁은 악이다"라는 전제하에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이에나가의 검증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27]

무로야 가쓰미는 이에나가를 황국사관의 무리였다가 좌익으로 전향한 역사학자라고 평가했다.[28]

다카야마 마사유키는 이에나가를 전전에는 "펜을 가지고 황국의 방패가 되리라"라고 했지만, 황국이 패망하자 GHQ에 영합하여 역사서를 고쳐 쓴 변절자라고 비판하며, 거짓투성이 교과서를 불합격시킨 문부성에 불만을 품고 국가를 고소한 불모의 교과서 재판을 30여 년이나 계속했다고 비판했다.[29]

나가오 류이치는 이에나가가 끊임없는 정열로 구 일본을 맹렬하게 규탄하는 것은 약을 너무 오래 복용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평가했다.[30]

도요타 아리쓰구는 한국에서 이에나가를 가장 인기 있고 양심적인 역사학자로 여기며, 일본의 검열 때문에 박해받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31] 실제로 한국의 중앙일보에서는 이에나가를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국가권력에 대항한 일본의 양심"이라고 소개했다.[32]

하타 이쿠히코는 이에나가가 "신일본사"(1947)에서 천황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다가 "쇼와의 전후사"(1976)에서 맥아더 옆에 선 키 작은 모닝코트 차림의 일본인으로 묘사하는 등 천황관에 극단적인 변화를 보였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사람은 청소년을 교육하는 교과서 집필자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말했다.[38]

하타는 『태평양 전쟁』(1968)을 학술 연구서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평가하며, 인용 문헌의 부적절성, 감정 과다의 기술, 비공개 하바롭스크 군사 재판 진술서 주체, 관계없는 논문 인용, 영어판에서 일본에 불리한 내용 삭제 등을 이유로 들었다.[39][40]

제3차 이에나가 소송에서 일본 정부 측 증인인 하타 이쿠히코는 1983년 교과서 검정 당시에는 731 부대에 관한 신뢰할 만한 학술 연구 논문이나 저서가 발표되지 않았다고 하며, 해당 부대에 관한 기술의 전면 삭제를 검정 합격의 조건으로 한 문부성을 지지했다.[44] 하지만 최고재판소 오노 판결에서는 검정 당시 이미 731부대에 관해 다수의 문헌과 자료가 공표되었으며, 해당 부대의 존재 등을 부정하는 학설은 보이지 않았고, 문부성은 재량권의 범위를 일탈했다고 판단했다.

이에나가는 『전쟁 책임』(1985)과 『태평양 전쟁 2판』(1986)에서 요시다 세이지의 '나의 전쟁 범죄 - 조선인 강제 연행'(1983)을 인용하여 종군 위안부 강제 연행 기사를 게재했다. 그러나 하타는 1992년 현지 조사를 통해 요시다의 기사가 사실무근이라고 보고했으며, 히가키 다카시는 이에나가의 "위안부"에 관한 부분이 모두 요시다의 '창작'의 인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45]

4. 3. 대한민국과의 관계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 고대 사상사, 특히 불교 사상사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점차 연구 영역을 넓혀 반권력적인 자세를 강화하고 사회적 발언을 했다. 우에키 에시모리, 미노베 다쓰키치, 쓰다 소키치, 다나베 하지메 등 비슷한 경향의 근대 사상가 연구와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사상사적 접근을 시도한 논저를 많이 발표했다. 특히 『태평양 전쟁』은 널리 읽혔지만, "한국 전쟁"(미국의 침략에 의한)이라고 기록했다.[14][15]

참조

[1] 웹사이트 Obituary: Saburo Ienaga: One man's campaign against Japanese censorship https://www.theguard[...] 2002-12-03
[2] 뉴스 Persistence of memory: Saburo Ienaga insists Japan remember an unsavoury war to ensure dreams of peace The Vancouver Sun 2001-03-07
[3] 서적 Japan's Past, Japan's Future: One Historian's Odyssey Rowman and Littlefield 2004
[4] 서적 現代史の対決 文春文庫
[5] 문서 東京高等学校編『東京高等学校一覧 第17(昭和17年4月-18年3月)』東京高等学校、1942年、p.166 https://dl.ndl.go.jp[...]
[6] 문서 『東京帝国大学卒業生氏名録』東京帝国大学、1939年、p.341 https://dl.ndl.go.jp[...]
[7] 웹사이트 恩賜賞・日本学士院賞・日本学士院エジンバラ公賞授賞一覧 第31回 (昭和16年) ~ 第40回 (昭和25年)(日本学士院) http://www.japan-aca[...] 2017-08-24
[8] 문서 日本学士院紀要6巻2・3号 pp10 -12
[9] 학위논문 主として文献に拠る上代倭絵の文化史的研究
[10]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藝春秋
[11] 문서 「人間の記録 35巻 家永三郎」(日本図書センター 1997年)
[12] 문서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13] 서적 秋田の母ちゃん統一協会とわたりあう かもがわ出版 2003
[14] 서적 太平洋戦争 岩波書店 1986
[15] 서적 太平洋戦争 岩波書店 1968
[16] 뉴스 Saburo Ienaga: One man's campaign against Japanese censorship The Guardian 2002-12-03
[17] 간행물 日本歴史 吉川弘文館 2015-01
[18] 학술지 「家永三郎文庫」史料目録(書籍・雑誌)
[19] 문서 『家永三郎集』16
[20] 문서 『家永三郎集』16
[21] 뉴스 「教科書裁判は「思想的作品」 歴史学者・家永三郎さんを悼む」 2002-12-10
[22] 서적 戦争責任 岩波現代文庫 S50
[23] 서적 日本人に生まれて、まあよかった 新潮新書 ""
[24] 서적 「悪魔祓い」の戦後史 進歩的文化人の言論と責任 文春文庫
[25]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藝春秋
[26]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藝春秋
[27] 서적 「従軍慰安婦」 朝日新聞vs.文藝春秋 文春新書
[28] 뉴스 新・悪韓論 [https://megalodon.jp/2015-0424-0308-46/www.zakzak.co.jp/society/foreign/news/20150423/frn1504231140001-n1.htm 「ウリジナル」発生のメカニズム 渦中の首相も染まった史実無視の対日史観] 夕刊フジ 2015-04-23
[29] 서적 変見自在 スーチー女史は善人か 新潮文庫
[30] 간행물 46人に聞く まだ安全か、もう危険か 日本ナショナリズムの血圧を測る 2003-03
[31] 서적 いい加減にしろ韓国 日本を嫉妬し、蔑む真の理由 祥伝社新書|ノン・ブック
[32] 뉴스 「日本の良心」家永三郎氏、教科書歪曲と32年間闘争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09-05-15
[33] 서적 汚辱の近現代史 徳間文庫
[34] 서적 大東亜戦争肯定論 番町書房 1970
[35] 서적 大東亜戦争肯定論 番町書房 1970
[36] 서적 革新幻想の戦後史 中央公論新社
[37] 간행물 展望
[38]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藝春秋
[39]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春文庫
[40]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藝春秋
[41]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下 文春文庫
[42]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藝春秋
[43]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藝春秋
[44]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藝春秋社
[45] 서적 現代日本の問題集 講談社現代新書
[46] 문서 大倉山論集 1978-03
[47] 문서 歴史学研究
[48] 서적 変節の知識人たち PHP研究所
[49] 간행물 祖国再建 諸君!
[50] 서적 "「悪魔祓い」の戦後史 進歩的文化人の言論と責任" 文春文庫
[51] 서적 "日本教育小史 近・現代" 岩波新書
[52] 서적 "国家と歴史 戦後日本の歴史問題" 中公新書
[53] 서적 一歴史学者の歩み 岩波現代文庫
[54] 서적 現代史の争点 文藝春秋
[55] 뉴스 読売新聞朝刊 http://nippon.zaidan[...] 読売新聞 1993-03-18
[56] 웹사이트 家永三郎集(岩波書店) http://www.iwanami.c[...] 2007-09-26
[57] 문서 日本古書通信 199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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